민홍철은 1961년 4월 18일,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부친 민경만과 모친 윤재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누구보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자랐다. 그 당시, 모든 아이들이 힘겨운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홍철의 상황은 더욱 딱했다.
그는 남문 밖 쓰레기 더미에서 고철을 주워 고물상에 팔며 생활비를 벌었고, 여름철에는 김해평야 수로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용돈을 마련했다. 가난 속에서도 홍철은 항상 마음만은 풍족하게 살기를 꿈꾸었다.
홍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중학교 3학년 때, 방 두 칸짜리 셋집으로 이사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치 세상이 다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중3이 되면서 현실적인 고민이 생겼다.
“다른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
부모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이미 철이 든 홍철은 집안 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문계 대신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간곡한 꾸짖음에 생각을 바꾼 홍철은 결국 인문계인 김해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도 홍철의 성적은 항상 전교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는 학업에만 몰두하지 않고, 글짓기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왕릉공원 백일장과 진주 개천예술제에서는 학교 대표로 매번 출전했고, 중학교 때는 고전읽기 대회 경남대표로 서울 전국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친구들과도 두루 잘 어울리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가정에 또 다른 시련이 닥친 것은 고교 2학년 때였다. 어느 가을, 일을 나갔다 온 모친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고3 입시생이 된 홍철은 어린 네 명의 동생들을 보살피며 공부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철은 김해고를 졸업할 때까지 다재다능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청년으로 성장해나갔다. 주위에서는 서울의 명문대를 권했지만, 동생들을 두고 멀리 떠날 수 없었던 홍철은 부산대학교를 선택했다.
부산대 법대 80학번으로 입학한 민홍철은 가슴 벅찬 대학생활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입학식 날 교문 양쪽에 서 있던 두 대의 탱크는 곧 다가올 시국을 암시하고 있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군사정권의 출범으로 인해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고, 홍철의 첫 해 대학 생활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2학년에 올라간 홍철은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그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철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힘든 시기도 결국 지나갈 거야. 내가 법을 공부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야. 절대 흔들리지 말자.“
대학생이 된 후 딱 한 번, 민홍철은 미팅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날, 운명처럼 만난 여인은 바로 지금의 아내 신외숙이었다. 그녀는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길잡이가 되어 주며, 함께 1남 2녀를 키우고, 홍철의 곁에서 의정활동을 적극적으로 내조하고 있다.
홍철은 군 법무관으로 임관해, 각급 부대의 검찰관과 군판사, 법무참모를 거쳐 20여 년 만에 마침내 장군(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 후 3년 동안 군법무관의 최고 직위인 육군본부 법무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하고 예편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홍철은 육군법무감으로서 청와대의 하명을 받아 국방부 검찰단에서 실시한 장성진급 인사비리 수사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 인해 군 안팎에서 신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청렴성과 공정성도 인정받았다.
군 법무관은 일반적인 장교후보생 군사훈련은 물론, 사법연수원과 군 행정 관련 교육까지 수료한 후 소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중위로 임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 법무관은 대위나 소령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 법무관이 장군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김해 출신의 홍철은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의 능력과 합리적인 성품,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정신이 이룬 쾌거였다.
중견법무관 시절, 홍철은 검찰관과 군판사의 직책을 맡아 군 기강을 확립하고 군내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힘썼다. 그의 철저한 소임 수행은 물론, 때로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또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제도 개선을 통해 군 사법제도 개혁에 남다른 의지를 보였고, 법무관이 진급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심사의 공정성을 높였다. 그는 군대 내 법치주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철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역사였다. 김해의 인재가, 대한민국의 군대에서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2008년, 홍철은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준장)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었다. 그는 서울에서 법무법인 재유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며 화려한 법조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고향 김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09년 10월,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김해에 새로운 사무소를 열었다. 서울에서 고향 선후배들의 법률 상담을 처리하는 것이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연로하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 홀로 다섯 남매를 키워주신 부친을 편히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김해 사무소를 연 후, 홍철의 일상은 마치 폭풍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23년 동안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온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 강서구에서 찾아온 70대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농사지을 기력도 없어서 묵혀 두었던 밭을 몇 푼 받고 빌려줬더니, 구청에서 벌금을 부과해서 땅을 팔아야 할 판입니다.”
또 다른 농부는 농사용 하우스를 짓기 위해 거액을 투자했지만, 비가 새고 통풍이 되지 않아 토마토 농사를 망쳤다며 절망적인 얼굴로 찾아왔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개발이 활발한 지역에서 행정절차나 법을 몰라 큰 손해를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홍철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여러 지역 언론을 통해 무료 법률 상담을 진행했고, 생활법률 특강에 나서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홍철은 큰 결심을 했다. 바로 법원과 검찰의 김해 지청·지원 유치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에게 '법'은 그저 두려운 존재였다. 창원과 부산을 오가는 시간과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홍철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현실을 바꾸고자 했다. 그는 법이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로 인식될 수 있도록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는 신념을 가졌다.
"여러분, 우리는 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이 가까이 있고,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신념은 그의 의정활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그는 수많은 민생 법안을 발의하며 김해 지역 법원 설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는 가난도 죄가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의 부모님도 그러했다. 부모님은 등골이 휘어지게 일하며 5남매를 키우셨지만, 남들만큼 잘 입히고 먹이지 못한 것을 늘 죄스러워하셨다. 그러나 홍철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기죽지 않도록 반듯하게 가르쳐주신 부모님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학창 시절, 홍철은 가난한 군인의 아내가 되어준 아내와 만났다. 아내는 그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기꺼이 뒷바라지해주었다. 세 아이는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몇 번씩 전학하며 자랐다. 홍철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홍철의 담임선생님은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어느 독지가와 연결해주셨다. 그 독지가는 김해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부부였다. 이 부부는 홍철이 고교와 대학을 마칠 때까지 학비, 책값, 용돈까지 대주며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행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홍철 역시 이들을 부모님처럼 공경했다. 두 분은 은퇴 후 부산으로 이사하셨고, 남편분이 타계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홍철은 그 모든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은혜가 아닌 '세상에 진 빚'이라고 여겼다. 이자에 이자를 쳐서 더 많은 이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대한변호사회 노인법률지원 변호사, 사단법인 김해노인대학 법률고문,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고문변호사, 지체장애인협회 김해시지회 인권위원장 등을 맡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지원 활동에 몸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홍철은 더 큰 꿈도 가지고 있었다. 국민들이 '법'을 약자의 편으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현실에 맞지 않거나 강자를 대변하는 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깨끗해야 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관계나 현실적 계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에게 입법을 맡기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민홍철은 가난을 벗 삼아 자란 서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강직한 군인정신과 법관의 합리적 성품을 갖춘 사람이었다. 다양한 삶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본 변호사이기도 했다. 김해가 뽑아준 국회의원으로서 김해시민이 맡겨준 소임을 다하며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의정활동을 펼쳤다. 새로운 대한민국과 국민의 행복,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국회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김해의 미래를 바꾸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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