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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 (인터뷰)군법무관 출신 첫 재선 의원 민홍철 전 육군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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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업무관리자 작성일16-12-12 13:18 조회2,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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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 `16.12.12] (인터뷰)군법무관 출신 첫 재선 의원 민홍철 전 육군준장

 

"주어진 환경은 나만의 인생 만드는 한 요소"
군법무관은 다양한 업무경험 쌓을 좋은 직업
청년취업난 엄중하게 인식... '청년은 미래다'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군법무관이 예비 법조인들에게 떠오르는 직업군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군대는 남성 집단이라는 전통적인 인식에도 불구, 군법무관에 지원하는 여성들도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

 

육해공군의 법무과 장교에 해당하는 군법무관은 군사법원의 군판사, 군검찰부의 검찰관으로 임명될 수 있으며 대우는 법관 및 검사의 대우에 준한다.

 

군법무관으로 임용돼 고등군사법원 군판사, 육군본부 고등검찰부 부장, 고등군사법원 법원장 등을 지낸 민홍철 전 육군준장은 지난 19대 국회에 입성, 이번 20대 국회에서는 재선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차분한 어조로 차근차근, 그러나 빈틈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에게서 누구 못지 않은 열성과 집념, 또 성실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의 장남으로서, 자신을 위해 최상의 길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기보단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끔은 차선을 선택하기도 해야만 했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지나온 모든 길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는 그. 주어진 환경과 출신이 그를 어떤 상황에서도 노력하게 만들었고, 지금의 그가 있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예비법조인들과 청년들에게 애정 어린 격려와 조언을 전한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경남 김해시갑, 국토교통위 소속)을 법률저널이 만나봤다.

  

- 군법무관 출신 국회의원이 흔하지 않다. 25년 동안 군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또 그 경험들이 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하는데 특히 영향을 미친 바가 있다면 어떤 점들인가.

 

군법무관 출신 국회의원은 내가 4번째다. 재선까지 한 의원으로 치면 처음이다. 1984년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해 육군 법무감, 고등군사법원장을 거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25년 동안의 군 경험은 의정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군법무관으로서 군 제도의 문제, 군대 내 인사 문제, 군인 인권 문제, 기타 각종 사건·사고들을 다뤘고 검찰부장으로 있을 때엔 군대비리, 방산비리 수사를 하면서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법무병과는 하나의 병과로 독립해 군과 관련한 모든 법률적 문제를 취급한다. 이 군사법원이 이전에는 사단급으로 설치됐는데, 지난 2014년 윤일병 사망 사건이 터진 후로 군사법기능에 대한 지적에 따라 군단급으로 격상시켰다. 군사법원은 일반법원과 달리 관할관이라고 이야기되는 지휘관의 통제 하에 있는데, 군판사도 관할관이 임명하고 일정 범위의 형 감경권한이 그에게 주어져 있다. 군단급으로 격상시켜 전체 군사법원 수는 줄었지만 그만큼 높은 계급의 관할관 하에 있게 된 것이다.

 

또 공직에 25년 있었던 것이 정부와의 관계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에 장군 출신 국회의원이 나밖에 없는데, 지난 19대부터 이런 경험을 살려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이번 20대에서는 국토교통위 간사를 맡고 있다.

 

-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이야기를 해 준다면.

 

내가 60년생인데 그 때는 나 뿐 아니라 주변 모두가 어려웠다. 전쟁 끝난지 10년도 안 된 시점이었으니 다 흙수저고 무수저였다. ‘부유하다’ 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공무원이거나 큰 사업을 하는 경우인데 그것도 주변에 흔치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열심히 사셨지만 그래도 막일을 하셨으니 우리는 더 어려웠다. 사글세를 낼 수 없어 월세 방 한 칸에 우리 5남매와 부모님, 7명이 지냈다. 책상 놓을 자리는 없고 장롱만 덩그러니 하나 있는 방인데 내가 중1때까지 그렇게 지냈다.

 

지금은 ‘다이어트 식품이다, 술안주다’ 해서 돼지껍데기를 사람들이 먹는데, 우리 때는 그게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네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잡는 날이면 가끔 그 돼지껍데기를 내게 먹으라고 가져다 주곤 했다.

 

또 중학교 때 두어 달에 한 번씩 불우이웃 돕는다고 선생님이 반 아이들한테 쌀을 걷는데, 그러면 한 학급 65명 되는 학생들이 흰 편지봉투 하나씩에 쌀을 담아왔다. 그것을 다 모은 박스 한 통을 선생님께서 내게 주시던 기억도 난다.

 

그래도 우리 때는 개인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시절이었다. 요즘은 돈 없으면 공부도 못 한다고 하지 않나. 수많은 참고서니, 과외니, 학원이니 돈이 있으면 그것들을 다 누리는데, 돈이 없으면 그렇지 못해 뒤처진다.

 

우리 때는 문제집 종류도 많지 않고 전문 과외 같은 것도 없어, 그저 책 붙들고 열심히만 하는 사람이 승자였다. 자기가 한 만큼 나오므로 공정했다.

 

학창시절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중학교 3년 내내 1등을 했다. 도시의 좋은 고등학교를 가려면 하숙비가 있어야 하는데 형편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내 친구들이 마산이나 진주 등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나는 모교인 김해고를 가게 됐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3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대학을 가려는데 그 때는 예비고사를 치르던 시절이다. 애당초 가고 싶었던 법대에 진학하려면 본고사에서도 좋은 점수가 나와줘야 했지만, 당시 서울명문대 본고사는 시골학생에게는 많이 어려웠다. 결국 학비도 저렴하고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부산대 법대를 가게 됐다.

 

대학에 가서도 고시반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모의고사는 다 응시했다. 그래야 다닐 수가 있으니까. 형편이 어려웠기에 더 공부할 수 밖에 없었다. 공부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공정한 사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안 그래도 요즘 청년들 사이에 ‘헬조선’이니, ‘금수저’니, 사회 구조적인 불공평에 대해 한탄하는 자조섞인 단어들이 유행이다. 학생이던 시절, 가난하지 않고 풍족했으면 삶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을 가진 적은 없는지.

 

가정형편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점에 대한 아쉬움은 거의 없다. 물론 우리 때도 서울 명문대 정도 대학을 나오면 인생의 출발선이 남들보다 50보 앞서 있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하고 싶었던 검사, 판사 일을 군 안에서 다 했고 또 군법무관 최고 위치에까지 올랐다. 전역해서 변호사 일도 잠시 해보고, 지금은 국회의원으로서 일하고 있다. 나의 경우엔 주어진 환경이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만의 인생을 만드는 한 요소였다고 본다.

 

그렇다고 공부밖에 안 했느냐, 그렇지 않다. 우리 때는 뛰어 놀 곳이 참 많았고, 공부하느라 놀 수가 없는 지금 아이들과는 달랐다.

 

여름에는 비온 뒤 김해평야 수리도랑에 나가면 미꾸라지가 넘쳐났는데 아이들하고 그것을 잡아다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동네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았고, 제기차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딱지 따먹기 등 함께 할 놀이도 많아서 참 재밌는 시절을 보냈다. 

 

- 로스쿨 출범 이후 예비법조인들 사이에서 군법무관이 진로로서 상당히 인기가 높다. 군법무관이 어떤 장점이 있는지 소개해달라.

 

군법무관 시험제도가 없어진 후 로스쿨 졸업생 중에서 군법무관을 선발하고 있다. 로스쿨 출신들에게서 선호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작년만 해도 선발 시험에 5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그 중 또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여성 지원자였다고 한다.

 

남녀 구분없이 군법무관은 좋은 진로일 것이다. 남녀 평등한 대우가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여성 군법무관도 상당히 많다. 장군까지 했던 이은수 변호사를 보면, 실력만 있으면 여성도 얼마든지 최고 자리까지 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초임 때는 전방의 사단에서 근무를 해야 하지만 대위부터 시작하니까 보수도 좋다. 들어와서 검찰이나 판사로서의 업무를 다 할 수 있고 인권 문제, 민형사 송무, 국가배상, 군 정책 등 법률 관련한 군 내 모든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어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다. 미군 법무관들과의 교류를 위한 유학의 기회도 가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따오는 경우도 있다.

 

- 변호사로서도 활동을 했다. 현재 변호사업계가 많이 어려운데, 변호사업계의 요즘 상황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내가 2008년 변호사 등록을 하고 3년 정도 활동을 했었다. 당시 등록번호가 1만번대였는데 지금 2만명이라고 하니,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내가 개업할 당시 법조시장이 4조원대라고 들었다. 해가 가도 법률 시장 규모는 거의 그대로인데, 로스쿨 출범으로 변호사 배출 수가 갑자기 급격히 늘어나 업계가 어려워졌다.

 

변호사업계 주장처럼 이제와서 로스쿨 통폐합 등으로 배출 숫자를 줄여나간다고 해서 크게 상황이 나아질지는 의문이다. 법률시장 확대에 힘써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19대 때도 그랬지만 로스쿨 일원화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사법시험이든 예비시험이든 교육을 통하지 않은, 또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줘야 한다.

 

로스쿨 일원화쪽에서는 장학금 제도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의미가 다르다. 다만 우회로 통한 선발은 50에서 100명 정도의 소규모여야 할 것이다.

 

한편 변호사라는 직업이 갖는 공공성과 법조 삼륜의 하나로서 사회 정의를 지탱하는 역할의 중요성은, 시대 변화와 경제 상황에 따라 퇴색되지 말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는 일제치하 독립투사를 변호하는 등 지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정권 이후 숫자를 늘려 점점 그 희소성이 떨어지고, 이제는 일반적인 전문 자격사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여전히 변호사는 우리 사회 최고 지성인 집단이다. 국민들이 변호사들에게 갖는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고, 공익의 수호에도 보다 힘써줘야 한다.

 

- 우수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의원으로 유명하다. 지역구인 김해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추진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있다고 여기는 사례 한 가지를 꼽는다면. 또 현재 주력하고 있는 활동도 소개해 달라.

 

한가지를 꼽으면 김해 부산간 경전철 문제를 들 수 있다. 김해와 부산 간 경전철을 건설하면서 이를 민간자본으로 했고, 운영권도 민간이 갖도록 했다.

 

김해와 부산은 건설·운영비를 20년 동안 환산해서 줘야 하는데, 이것을 MRG 방식으로 한 것이다. 즉 실제 탑승객이 계약 당시 예측했던 일일 탑승객의 74%에 미치지 못하면 그 차액을 보전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수요조사가 잘못됐다. 개통 시점인 2010년 김해시 인구를 60만, 하루 탑승객을 21만으로 예측했는데, 실제로는 2010년 김해시 인구는 50만, 하루 탑승객은 2만 9천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김해와 부산이 보전해야 할 금액은 20년간 2조3천억 원, 김해와 부산의 분담비율이 6대 4이므로 김해는 한 해 650억씩을 부담하게 됐다.

 

정부는 이에 대해 지자체와 민간의 계약이니 어떤 협조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해로서는 경전철 적자보전이 부담이고, 나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토교통위원회로 들어간 측면이 크다.

 

결국 도시철도법을 개정해서 정부가 재정지원을 전제로 한 행정적인 지원을 해 주도록 법안을 냈고 이것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낼 근거규정은 일단 마련한 셈이다. 다만 아직까지 실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가시적인 성과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한다.

 

지금 주력하고 있는 사안으로는 가야문화권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정부는 수조원을 투입해서 경주 중심의 신라 문화권을 개발해 관광지로 만들었다. 또 부여, 익산, 공주 중심의 백제문화권도 정비를 잘 해놨다.

 

가야의 철기 문물과 문화유산도 신라, 백제에 비견할만큼 우수하고 그 가치가 뛰어나다. 반드시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체계적으로 정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가야문화는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를 포함해 상당히 넓은 영역에 형성돼 있다. 이 가야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구 의원들과 포럼을 만들고, ‘가야문화권 역사유적 복원과 개발’을 위한 법안을 만들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에도 힘쓰고 있다.

 

또 국토교통위 소속으로서 주택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높은 전세가격, 주거 양극화, 주거복지 실현 등 해결해야 할 주택문제가 많다. 주택가격 안정과 공공임대아파트 보급, 신혼부부·학생·직장인 등에 대한 맞춤형 주택 보급 등 적절한 정책 입안을 정부에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아울러 전월세 상한제나 세금 탈루 방지 위한 임대인 등록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도 제출하여 심의 중에 있다.

 

-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청년 세대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 준다면.

 

청년들이 겪는 극심한 정신적 압박을 잘 알고 있다. 취업이 돼야 가정을 꾸리고 주거를 마련해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아갈 것인데 취업부터가 바늘구멍이다.

 

우리 때는 취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는 인구도 한 해 15만명 남짓이었고, 당시는 무역이나 조선, 자동차 등 산업이 한참 성장가도를 달리는 때였다. 의류·제조업 역시 막 성장기에 접어들어, 가려고만 하면 대기업도 골라서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윗세대들이 부지런히 일구어 놓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던 세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을 보면서 걱정이 큰 건 아버지 세대보다 가난하게 사는 첫 세대가 우리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기업은 부유한데 개인은 가난한 시대가 된 것 같다. 나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일자리는 부족하고, 그마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줄어들게 된다. 취업만을 위해 청년들은 졸업을 하고도 몇 년씩 ‘스펙쌓기’를 한다. 청년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정을 꾸리기가 힘들면 앞으로 한국이 맞이할 인구절벽은 국가 성장을 크게 저해할 것이다. 국가경쟁력은 인구수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부가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청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 이율이 2% 대인데, 이것도 너무 높다. 청년들이 빚쟁이인 채로 첫출발을 한다면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사회불안요소가 된다. 무이자로 하든지, 학생들이 자립한 후에 갚아나가게끔 하든지 해주어야 한다.

 

다만 청년들에게는 자립심과 독립심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때에 비하면 청년들이 과보호 속에 자라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하다.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거나 스스로 문제를 돌파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 젊음은 자산이다. 열정과 패기, 의지를 갖고, 상황에 치열하게 맞서 뚫고 나가야 한다. 청년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고 희망이다.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강미정 기자 hova@lec.co.kr

 

 

 

기사원문 및 사진출처 : (법률저널)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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